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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칸 영화제의 주연은 최민식이었다

▲ 제 59회 칸 국제영화제 이틀째인 지난 18일, 영화제 주 행사장 앞 광장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호소하는 최민식과 프랑스 좌파 언론의 상징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2006 박영신

플로랑스 오브나스. 그는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기자이고 지난해 1월 5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무장단체에 납치됐다가 5개월 만인 6월 12일 풀려난 프랑스 좌파 언론의 상징이다.

또한 그는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 해 장 피에르와 뤽 다르덴 형제 감독이 <더 키드>로 수상한 황금종려상을 그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그런 오브나스와 배우 최민식이 만났다.

"간바레! 브라보! 알레!... 민식, 끝까지 싸워"

제59회 칸 국제영화제 이틀째인 지난 18일 영화제 주 행사관 앞 광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저녁 8시 30분경(이하 현지 시각) '문화침략 저지 및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이하 대책위)' 홍보대사 최민식씨가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에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광장 전면에 걸려는 순간,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저지에 나섰다.

▲ 최민식의 1인시위를 경찰이 제지하자, 프랑스 기자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06 박영신
3~4명의 경찰에 둘러싸인 최민식과 양기환 대변인은 "세계 영화인이 공감하는 미국의 문화 패권주의의 부당함을 알리고 국제적인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내는 자리로 칸을 선택했고, 평화 시위를 벌일 생각"이라며 시위를 허용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대책위와 경찰 간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한 사람 두 사람 구경꾼이 몰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최민식은 각국 언론의 카메라에 포위되고 말았다. 카메라와 시민의 무리 속에 최민식은 휩싸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때였다.

"간바레!" 한 일본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서 "브라보!"를 외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누구지?"
"최민식, 올드보이"

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최민식의 팬들이 하나둘 플래카드를 들기 시작했다. 사연을 알게 된 젊은이 하나가 소리쳤다.

"난 저런 사람들이 정말 좋아, 눈물이 날 것 같잖아"
"최민식, 끝까지 싸워!"
"알레(아자)! 민식!"

얼핏 보이는 최민식의 얼굴도 상기돼 보였다.대중의 힘이었을까. 계속 저지할 수 없었던 경찰은 한 쪽으로 물러났다. 언론의 카메라와 시민의 목소리가 경찰을 멀찌감치 밀어낸 것이었다.

▲ 중국 방송사와 인터뷰 하고 있는 최민식. ⓒ2006 박영신
중국의 한 TV를 시작으로 일본 방송과 프랑스·영국 등 각종 언론들이 최민식에 마이크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인기 민영TV 채널 <카날 플뤼스>, 라디오 <유럽1> <라디오 프랑스>의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플로랑스 오브나스가 나타난 것은. 발 디딜 틈 없는 군중을 비집고 오브나스가 최민식 곁으로 파고든 것이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와 최민식의 칸 방문 등에 오브나스가 관심을 보였다는 말은 익히 들었으나 이렇듯 우연히 만남이 이뤄질 것이라 상상하지는 못했던 터였다. 오브나스는 묻고 최민식은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둘 초를 든 시민들이 최민식을 호위했다. 이어지는 인터뷰 요청에 숨돌릴 여유조차 찾지 못하는 최민식과 대조적으로 조용히 그의 옆을 지키는 시민들은 손에 손에 든 촛불로 칸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시민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1인 시위를 접으며 최민식은 자발적으로 시위에 함께 했던 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또한 그는 시위를 허락해준 프랑스 경찰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현장의 시민들도 경찰을 돌아보며 한 목소리로 외쳤다. "메르시(고맙습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던 영화인들의 1인 시위가 100일째를 맞는 날이었다.

▲ 최민식과 시위단이 지지자들과 취재진에 둘러싸여있다. ⓒ2006 박영신
전세계 영화팬들이 외쳤다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길거리 한복판에서 돈을 받고 사람들에게 매맞아주는 일을 하는 왕년의 복싱스타 태식. 영화 <주먹이 운다(2005, 류승완)>에서 최민식이 맡은 역할이다. 태식은 피켓 하나 목에 걸고 목이 터져라 사람들을 불러모으지만 무심한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끌기는 역부족이다.

최민식이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위해 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연상된 이미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해외의 언론·영화인·시민이 한국의 스크린쿼터 '따위'에 관심이나 보여줄까?

지난 17일 오후 팔레 데 페스티발의 팔레 광장에서 최민식을 비롯해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칸 원정단 10여 명이 침묵시위를 시작할 무렵만 해도 이 생각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올해는 미국 블록버스터의 상징 <다빈치 코드(2006, 론 하워드)>가 개막작으로 칸 영화제의 화려한 막을 올린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스타들이 팔레 데 페스티발의 붉은 양탄자를 밟기 직전, 팔레 광장에서 시위가 벌어진다면 도대체 누가 관심을 보여줄까. 도대체 누가 지루한 침묵 시위에 참가할까 말이다.

기우였다. 침묵시위가 시작되기 1시간 여 전 일단의 한국인 학생들이 최민식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유럽여행 중 영화제를 보기 위해 칸을 찾았다는 학생 10여 명이었다. 망설임없이 스크린쿼터 사수를 역설하는 최민식에 학생들은 귀를 기울였다.

뿐만 아니었다. 칸 영화제에 마켓 부스를 마련해 영화 홍보에 여념이 없는 영화 제작사 '싸이더스' '청어람' '튜브엔터테인먼트' 등에 속한 한국 영화인 50여명이 차례차례 팔레 광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턱시도와 야회복 차림을 한 프랑스 문화예술인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났다. 잠시 후면 팔레 데 페스티발의 화려한 붉은 계단을 밟고 올라야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 세계 70여개국 배우노조를 아우르는 국제 배우노조연맹의 꺄트린 알메라스 부회장,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산하 공연예술노조의 끌로드 미셸 위원장, 칸 영화제 감독 주간을 전담하는 영화감독협회(SRF)의 뤽 르클레르 뒤 사브롱 부회장을 비롯한 20여 명의 프랑스 예술인이었다. 칸 영화제 개막식에 초청된 부산 국제영화제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모습도 보였다.

▲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답하고 있는 최민식. ⓒ2006 박영신
"올해 칸 개막작은 한국의 스크린쿼터 투쟁"

원정단이 나눠주는 티셔츠를 입고 자발적으로 플래카드를 든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는 내용의 지지 의사를 밝혔다.

끌로드 미셸 공연예술노조 위원장은 "올해 칸 영화제의 개막작은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라며 "이것은 칸 영화제 역사상 전례 없는 아름다운 투쟁"이라고 원정단을 격려했다.

시위가 진행되는동안 최민식을 알아본 프랑스 팬들이 주위로 모여들기도 했다. <올드 보이(2003, 박찬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최민식을 기억하는 이들은 최민식을 향해 "끝까지 싸워 이겨달라"며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기도 했다.

시위가 벌어지는 팔레 광장 맞은 편에서는 개막작 <다빈치 코드>의 제작사인 콜롬비아 영화사 직원 160여 명이 참석해 대조를 이뤘다. 오후 6시 30분 경 웅장한 팡파르가 울려퍼지고 올해의 심사위원장인 왕가위 감독의 지휘 아래 모니카 벨루치, 파트리스 르콩트, 장쯔이, 사무엘 L 잭슨 등 심사위원단이 팔레 데 페스티발을 오르기 시작했다. 전세계에서 찾아온 영화계 스타들이 그 뒤를 이었다.

<취화선(2002, 제55회 감독상), <올드보이(제57회 심사위원 대상)>로 이미 두 차례 칸의 붉은 양탄자를 밟은 바 있는 최민식은 이날 '한-미 FTA 반대' '세계 문화다양성 보장'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페스티발의 한 쪽에 서 있었다. 전세계 스타들이 오르고 있는 팔레 데 페스티발을 멀리서 바라보는 최민식의 어깨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한국 영화는 칸에서 싸우고 있다

빔 벤더스, 짐 자무시, 다르덴 형제, 허우 샤오시엔 등이 다녀간 지난해 칸 영화제는 한 마디로 전세계 거장들의 잔치였다. 지난해 5월 22일 영화제 폐막 다음날인 23일 영화전문지 <르 필므 프랑세>가 공개한 59회 칸을 빛낼 시네아스트로 거론됐던 스페인의 악동 페드로 알모도바르, 유럽의 우디 앨런으로 불리는 난니 모레티, 아키 카우리스마키 들이 올해의 칸을 찾았었다.

톈안먼 사태를 배경으로 만든 중국 영화 <여름궁전>(2006,로우 예)이 경쟁부문에 초대된 유일한 아시아 영화로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올해, 한국 영화는 분투하고 있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거대 자본이 만들어내는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올해의 칸에서 당당하게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연배우는 두말 할 필요없이 최민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