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경쟁력이 기업의 핵심역량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 바로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이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 산업디자인학과 교수직을 포기하고, 1986년 실리콘밸리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디자인전문회사인 '이노 디자인(Inno Design)'을 설립,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로 키웠다.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미국 IDEA의 금·은·동상, 유럽 디자인계의 최고 권위상인 '레드 닷 어워드(Red Dot Award)' 등 국제적 권위의 상들을 휩쓸고 있으며, 세계 시장을 석권한 아이리버 및 삼성 애니콜 등이 그가 디자인한 상품들이다.
얼마 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김 사장이 디자인한 '아이리버 H10'을 들고, "디지털라이프 시대를 선두에서 열어 젖히고 있다"고 칭송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삼성, LG, CJ, 동양 등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은 대부분 그를 초빙해 개인교습을 받거나 강의를 들었으며, 중국의 최대 전자 기업 중 하나인 TCL 회장이 그를 만나기 위해 직접 방한해 즉석에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얼마 전, 김 사장은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책 《이노베이터》를 출간했는데, 현재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도대체 김 사장의 어떤 면이 그를 세계적인 '디자인 구루'로 만들었을까...
김 사장을 만난 7월 13일 오전 11시. 그는 영국, 독일 등 유럽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한 후 곧바로 LG전자 창원공장에서 임직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저녁에 세 그룹의 모임에 참여해 술을 마시고, 다시 다음날 새벽에 현대백화점 임직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마치고 난 후였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 사장을 만나 디자인과 경영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 많이 바쁘시죠? 활발히 활동하는 디자이너이면서 CEO(최고경영자) 역할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군요. 두 역할을 함께 수행하면서 느끼는 장단점이 있을 것이고요. 디자이너와 CEO, 어떤 타이틀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저는 CEO보다는 디자이너 타이틀이 맞는 것 같아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CEO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전문 CEO를 고용할지도 모르죠. 전 지금도 디자이너로서 직접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걸 즐기고요. (두 역할을 병행하면) 이런 장점이 있더군요. 사실 우리 회사에 세계적인 스타급 디자이너들이 많이 몰립니다.
왜일까 생각해 봤는데,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회사의 최고 자리에 있는 사람이 회사를 운영하고 돈만 주는 게 아니라, 같이 뛰는 거죠. 그리고, 제가 그린 그림이 제품이 되고, 그것이 메가 히트작이 되는 과정을 보는 겁니다. 그게 다른 디자이너들에겐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사실 저에게 전세계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이 입사지원서를 보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저희 회사를 알게 됐냐하면, 우리 회사가 디자인 한 제품을 보고, 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봤기 때문이거든요. 디자이너 자리를 지키면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좋은 인재를 끌어 모으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 스타 지원자가 많으면 인재 고르기가 편하시겠습니다.
그렇죠. 수많은 사람 중에 고르니까 더욱더 최고를 선택할 수 있죠. 축구팀을 떠올려 보세요. 11명이 뛰잖아요. 110명이 있다고 10배 강한 것은 아니거든요. 축구팀의 구단주는 '베스트 일레븐'을 모을 수 있으면 게임에서 이깁니다. 디자인도 똑같아요. '베스트' 50명만 있으면 막강한 거예요.
우리 고객사들은 500명, 5000명, 혹은 그 이상씩 직원을 둔 회사가 대부분이에요. 그래도 우리한테 와서 디자인을 해달라고 해요. 수적인 측면에서 저희 회사보다 디자인 인력이 많은 경우도 있죠. 그래도 저희한테 찾아옵니다.
왜일까요? 디자인은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촉발되는 거예요. 아무리 머릿수를 열 배, 백 배 채운다고 경쟁력이 있는 게 아니죠. 그 차이를 모른다면 CEO가 디자인경영을 모르는 거예요.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최고의 디자이너는 디자인 회사를 선택한다는 겁니다.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예를 들어 전자회사에 가서 전자제품만 디자인 하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 최근 중국에 진출하셨더군요. 중국의 디자인 시장의 전망이 괜찮다고 봅니까?
중국의 TCL이라는 전자회사가 있어요. 중국의 최대 전자 그룹 중 하나죠. 그 회사 회장이 저를 방문했었습니다. 원래 일정은 8시 30분에 만나서 11시 정도까지 이야기 하고, 점심식사 후에 골프를 치기로 했어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회장이 갑자기 골프 치지 말고 좀 더 이야기를 하자는 거예요.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하면서 오후 늦게까지 디자인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그런데, 이야기 도중 회의실을 한 시간만 쓰자고 부탁하더군요.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어느새 즉석에서 디자인 의뢰서를 만들어 내놓더군요.
그날부터 한 달 만에 모든 계약 과정이 끝났어요. 그것을 계기로 이노디자인 베이징 스튜디오를 작년 11월에 설립했고, 첫 번째 디자인이 오는 10월에 나옵니다. 차세대 PC가 기본 컨셉트죠.
중국 기업인들이 디자인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산업 초기에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만큼 디자인 시장의 전망이 밝다고 봅니다.
- 중국기업의 디자인을 맡는다면 한국 기업들의 경쟁 상대를 돕는 것 아닌가요?
사실 그런 질문 몇 번 받았어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민으로서의 김영세가 있고, 디자이너로서의 김영세가 있다고요.
디자이너의 목표는 소비자를 편하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이죠. 저의 소비자는 전세계 인류입니다. 중국 회사의 제품 디자인을 하는 건 중국 기업이어서가 아닙니다. 그 제품은 결국 한국 사람도 쓸 것이며 미국, 유럽 사람도 쓸 겁니다. 세계 시장은 이미 하나니까요. 그래서 저는 디자인을 맘껏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한국의 디자이너로서 중국에서 1인자가 되면 그 효과는 또 어떨까요? 한국 기업의 긍정적인 이미지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디자인은 기술과 다릅니다. 기술과 다르게 디자인은 샘물 같아서 퍼내면 퍼낼수록 계속 나오죠.
- 최근 블루오션 전략이 경영자들 사이에 화두입니다. 경쟁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누리는 푸른 바다, 블루오션은 어떻게 창출될까요? 디자인과 어떤 관계라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블루오션 관련 세미나에 초청돼 이런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기 헬리콥터가 피바다, 즉 레드오션을 향해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 피바다에서 헤매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어요. 헬리콥터에서 한 사람이 내려와서 사람들을 건져 저쪽에 있는 푸른 바다, 즉 블루오션으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누굴까요? 그 사람이 바로 김영세입니다. 그리고, 헬리콥터에 이노디자인이라는 브랜드가 찍혀 있습니다"라고요.
이 비유는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레인콤의 아이리버를 보세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협소한 MP3 시장을 놓고, 그렇고 그런 제품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 바로 디자인입니다. 이노디자인이 제품을 디자인한 이후, 아이리버의 매출이 4년 만에 80배나 올랐어요. 차별화의 핵심, 가치혁신의 방법은 다름 아닌 디자인입니다. 블루오션 창출의 해법이 바로 디자인이죠.
- '아이리버'의 디자인을 의뢰했던 레인콤의 양덕준 사장은 자주 만나시죠.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납니다. 제가 올 때마다 양 사장에게 블랙박스를 선물하죠. 그 안에 새로운 디자인이 들어 있습니다. 보통 함께 식사하고 난 이후 그걸 주는데, 아마 식사하면서 상당히 기대할 거예요. 사실 그렇게 준 디자인으로 만든 제품이 매번 100만개 이상씩 팔리는 제품이 됐거든요. 그래서 양 사장은 저를 '블랙박스 맨' 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고객의 요구대로 디자인을 대행한다는 생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달한다는 생각으로 디자인을 만들죠.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 우선주의' 입니다. 매번 의외의 디자인을 주고 그게 히트를 치니, 고객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거죠.
- 보통 고객사들이 먼저 연락을 하는 편인가요? 영업은 따로 하십니까?
대부분 먼저 찾아옵니다. 고객사에서 먼저 이러 저러한 상황을 설명하면, 우리가 다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서 최종 계약을 하는 식이죠.
아까 말씀드렸던 중국 TCL의 경우, 2015년까지 세계 1위를 지향한다는 회사 비전을 설명하더군요. 디자인 솔루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 제가 해법을 제시한 거죠.
-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십니까?
언제 어디서든 떠오르면 그립니다. 몰두하다보면 어느새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저는 모든 디자인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5분 동안에 전체의 95%가 끝난다고 봅니다. 영감이 중요하죠. 그리고, 나머지 5%를 위해 95%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죠.
-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책이 있다면...
톰 피터스 《미래를 경영하라!》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책은 디자인 책입니다. 감성마케팅, 이노베이션을 강조하는데 결국 디자인이 해법이거든요. 거기엔 10년 후에는 10억 달러를 버는 10명의 회사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와요. 전 저희 이노디자인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죠.
실제로 저희가 디자인한 모 브랜드의 핸드폰 중에는 한 모델로 1조원 이상 팔린 것이 있습니다. 10억 달러를 달성한 거죠. 가치혁신의 해결사 역할을 저희가 해낸 셈이죠.
- 가치 혁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디자인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고객사의 모 회장이 직접 한 말이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미국의 제일 큰 컨설팅 회사가 방문한다고 했나봅니다. 그랬더니 대뜸 "내가 한 시간 동안 그쪽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돼? 맨날 들어봤자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냐! 지금 계속 문제만 지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난 구체적인 솔루션이 필요해. 여기서 김영세 사장이나 좀 더 볼게!"라고요...
디자인은 솔루션이거든요. 해결책이죠. 디자인이라는 것이 이젠 21세기형 경영마인드가 됐다는 겁니다. 그건 말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실적이 나와야 하는 거죠.
- 삶의 목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글쎄요. 'DESIGN BY INNO'가 지구촌 곳곳에서 최고의 브랜드가 되는 것 정도라고 해두죠. 'DESIGN BY OO'가 'MADE IN OO'보다 우선시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또, 이노디자인 때문에 제품을 사는 것이 당연시 되는 시대가 오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만큼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느꼈으면 좋겠고, 저희가 그런 시대를 여는 데 일조했으면 합니다.
김영세 사장
1950년 서울 출생 / 74년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 78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학사·석사 / 80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 / 86년 미국 실리콘밸리 이노디자인 설립 / 97년 서울 이노디자인 설립 / 현재 이노디자인 대표이사
■ He is... - 예술가 기질의 창조적 CEO
김영세 사장은 사업가보다는 예술가 분위기를 더 많이 풍긴다.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등 외모부터 말하는 것까지 그 나이 그 또래, 그 정도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면 으레 따를 법한 것들을 거의 모두 깬다.
계획하기보다는 즉흥적인 상황을 즐기며, 불쑥불쑥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멋지게 정리되는 과정을 즐긴다. 회사에서는 회의 시간을 따로 두지 않으며, 아무 때고 즉석 미팅을 한다. 김 사장의 책상은 언제나 지저분하고 엉망인데, 반듯하고 정리된 것을 싫어하는 오래된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카오스에서 순간순간 아름다운 패턴이 나왔다 사라지듯, 정리되지 않은 책상에서 아이디어가 생기면 냅킨같은 주변의 물건을 이용해 무작정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그린 것이 수십억짜리 제품이 되고, 대박 상품으로 탄생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의 예술가적 성향은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교내 그룹사운드 '다이아몬드 포'를 조직해 음악에 빠졌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 쓰고 미대에 입학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시절엔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와 함께 도깨비 두 마리라는 의미의 '도비두'를 결성해 공연을 하고 다녔다. 관습적인 규칙에 따르기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체질적으로 즐기는 타입인 셈이다.
김 사장의 이런 성향은 아들에게 이어져 아들 윤민 군은 현재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최근 김 사장의 저서 《이노베이터》 출판 기념에서 윤민 군이 노래를 불렀는데, 김 사장은 아들을 '차세대 밥 딜런' 이라고 소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 사장은 디자인을 '인술(人術)' 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것을 아들에게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어린 아들이 어머니날(Mother's Day)에 선물한 재치 있는 쿠폰 북 디자인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는 것. 쿠폰 북에는 '엄마 차 세차하기' , '설거지 하기' 등 기특한 서비스와 유효기간이 적혀 있어 그 기간 내에 한 번씩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엔 'Love!!' 라고 적고, 유효기간을 'Forever(영원히)'라고 했다.
그는 아들의 작은 쿠폰 북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출발은 소비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것은 소비자 만족을 넘어 소비자 감동으로 이어지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디자인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수단인 것이다.
- Economic Review (272호) / 대담 : 김경한 편집국장, 정리 : 박일한 기자
그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 산업디자인학과 교수직을 포기하고, 1986년 실리콘밸리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디자인전문회사인 '이노 디자인(Inno Design)'을 설립,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로 키웠다.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미국 IDEA의 금·은·동상, 유럽 디자인계의 최고 권위상인 '레드 닷 어워드(Red Dot Award)' 등 국제적 권위의 상들을 휩쓸고 있으며, 세계 시장을 석권한 아이리버 및 삼성 애니콜 등이 그가 디자인한 상품들이다.
얼마 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김 사장이 디자인한 '아이리버 H10'을 들고, "디지털라이프 시대를 선두에서 열어 젖히고 있다"고 칭송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삼성, LG, CJ, 동양 등 국내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은 대부분 그를 초빙해 개인교습을 받거나 강의를 들었으며, 중국의 최대 전자 기업 중 하나인 TCL 회장이 그를 만나기 위해 직접 방한해 즉석에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얼마 전, 김 사장은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책 《이노베이터》를 출간했는데, 현재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도대체 김 사장의 어떤 면이 그를 세계적인 '디자인 구루'로 만들었을까...
김 사장을 만난 7월 13일 오전 11시. 그는 영국, 독일 등 유럽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한 후 곧바로 LG전자 창원공장에서 임직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고, 저녁에 세 그룹의 모임에 참여해 술을 마시고, 다시 다음날 새벽에 현대백화점 임직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마치고 난 후였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 사장을 만나 디자인과 경영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 많이 바쁘시죠? 활발히 활동하는 디자이너이면서 CEO(최고경영자) 역할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군요. 두 역할을 함께 수행하면서 느끼는 장단점이 있을 것이고요. 디자이너와 CEO, 어떤 타이틀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저는 CEO보다는 디자이너 타이틀이 맞는 것 같아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CEO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전문 CEO를 고용할지도 모르죠. 전 지금도 디자이너로서 직접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걸 즐기고요. (두 역할을 병행하면) 이런 장점이 있더군요. 사실 우리 회사에 세계적인 스타급 디자이너들이 많이 몰립니다.
왜일까 생각해 봤는데,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회사의 최고 자리에 있는 사람이 회사를 운영하고 돈만 주는 게 아니라, 같이 뛰는 거죠. 그리고, 제가 그린 그림이 제품이 되고, 그것이 메가 히트작이 되는 과정을 보는 겁니다. 그게 다른 디자이너들에겐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거죠.
사실 저에게 전세계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이 입사지원서를 보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저희 회사를 알게 됐냐하면, 우리 회사가 디자인 한 제품을 보고, 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봤기 때문이거든요. 디자이너 자리를 지키면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좋은 인재를 끌어 모으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 스타 지원자가 많으면 인재 고르기가 편하시겠습니다.
그렇죠. 수많은 사람 중에 고르니까 더욱더 최고를 선택할 수 있죠. 축구팀을 떠올려 보세요. 11명이 뛰잖아요. 110명이 있다고 10배 강한 것은 아니거든요. 축구팀의 구단주는 '베스트 일레븐'을 모을 수 있으면 게임에서 이깁니다. 디자인도 똑같아요. '베스트' 50명만 있으면 막강한 거예요.
우리 고객사들은 500명, 5000명, 혹은 그 이상씩 직원을 둔 회사가 대부분이에요. 그래도 우리한테 와서 디자인을 해달라고 해요. 수적인 측면에서 저희 회사보다 디자인 인력이 많은 경우도 있죠. 그래도 저희한테 찾아옵니다.
왜일까요? 디자인은 한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촉발되는 거예요. 아무리 머릿수를 열 배, 백 배 채운다고 경쟁력이 있는 게 아니죠. 그 차이를 모른다면 CEO가 디자인경영을 모르는 거예요.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최고의 디자이너는 디자인 회사를 선택한다는 겁니다.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예를 들어 전자회사에 가서 전자제품만 디자인 하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 최근 중국에 진출하셨더군요. 중국의 디자인 시장의 전망이 괜찮다고 봅니까?
중국의 TCL이라는 전자회사가 있어요. 중국의 최대 전자 그룹 중 하나죠. 그 회사 회장이 저를 방문했었습니다. 원래 일정은 8시 30분에 만나서 11시 정도까지 이야기 하고, 점심식사 후에 골프를 치기로 했어요.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회장이 갑자기 골프 치지 말고 좀 더 이야기를 하자는 거예요.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하면서 오후 늦게까지 디자인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그런데, 이야기 도중 회의실을 한 시간만 쓰자고 부탁하더군요.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어느새 즉석에서 디자인 의뢰서를 만들어 내놓더군요.
그날부터 한 달 만에 모든 계약 과정이 끝났어요. 그것을 계기로 이노디자인 베이징 스튜디오를 작년 11월에 설립했고, 첫 번째 디자인이 오는 10월에 나옵니다. 차세대 PC가 기본 컨셉트죠.
중국 기업인들이 디자인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이란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산업 초기에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만큼 디자인 시장의 전망이 밝다고 봅니다.
- 중국기업의 디자인을 맡는다면 한국 기업들의 경쟁 상대를 돕는 것 아닌가요?
사실 그런 질문 몇 번 받았어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국민으로서의 김영세가 있고, 디자이너로서의 김영세가 있다고요.
디자이너의 목표는 소비자를 편하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이죠. 저의 소비자는 전세계 인류입니다. 중국 회사의 제품 디자인을 하는 건 중국 기업이어서가 아닙니다. 그 제품은 결국 한국 사람도 쓸 것이며 미국, 유럽 사람도 쓸 겁니다. 세계 시장은 이미 하나니까요. 그래서 저는 디자인을 맘껏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한국의 디자이너로서 중국에서 1인자가 되면 그 효과는 또 어떨까요? 한국 기업의 긍정적인 이미지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디자인은 기술과 다릅니다. 기술과 다르게 디자인은 샘물 같아서 퍼내면 퍼낼수록 계속 나오죠.
- 최근 블루오션 전략이 경영자들 사이에 화두입니다. 경쟁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누리는 푸른 바다, 블루오션은 어떻게 창출될까요? 디자인과 어떤 관계라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블루오션 관련 세미나에 초청돼 이런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기 헬리콥터가 피바다, 즉 레드오션을 향해 날아가고 있습니다. 그 피바다에서 헤매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어요. 헬리콥터에서 한 사람이 내려와서 사람들을 건져 저쪽에 있는 푸른 바다, 즉 블루오션으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누굴까요? 그 사람이 바로 김영세입니다. 그리고, 헬리콥터에 이노디자인이라는 브랜드가 찍혀 있습니다"라고요.
이 비유는 절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레인콤의 아이리버를 보세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협소한 MP3 시장을 놓고, 그렇고 그런 제품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 바로 디자인입니다. 이노디자인이 제품을 디자인한 이후, 아이리버의 매출이 4년 만에 80배나 올랐어요. 차별화의 핵심, 가치혁신의 방법은 다름 아닌 디자인입니다. 블루오션 창출의 해법이 바로 디자인이죠.
- '아이리버'의 디자인을 의뢰했던 레인콤의 양덕준 사장은 자주 만나시죠.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납니다. 제가 올 때마다 양 사장에게 블랙박스를 선물하죠. 그 안에 새로운 디자인이 들어 있습니다. 보통 함께 식사하고 난 이후 그걸 주는데, 아마 식사하면서 상당히 기대할 거예요. 사실 그렇게 준 디자인으로 만든 제품이 매번 100만개 이상씩 팔리는 제품이 됐거든요. 그래서 양 사장은 저를 '블랙박스 맨' 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고객의 요구대로 디자인을 대행한다는 생각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달한다는 생각으로 디자인을 만들죠.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 우선주의' 입니다. 매번 의외의 디자인을 주고 그게 히트를 치니, 고객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거죠.
- 보통 고객사들이 먼저 연락을 하는 편인가요? 영업은 따로 하십니까?
대부분 먼저 찾아옵니다. 고객사에서 먼저 이러 저러한 상황을 설명하면, 우리가 다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서 최종 계약을 하는 식이죠.
아까 말씀드렸던 중국 TCL의 경우, 2015년까지 세계 1위를 지향한다는 회사 비전을 설명하더군요. 디자인 솔루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 제가 해법을 제시한 거죠.
-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십니까?
언제 어디서든 떠오르면 그립니다. 몰두하다보면 어느새 아이디어가 떠오르죠. 저는 모든 디자인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5분 동안에 전체의 95%가 끝난다고 봅니다. 영감이 중요하죠. 그리고, 나머지 5%를 위해 95%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죠.
-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책이 있다면...
톰 피터스 《미래를 경영하라!》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책은 디자인 책입니다. 감성마케팅, 이노베이션을 강조하는데 결국 디자인이 해법이거든요. 거기엔 10년 후에는 10억 달러를 버는 10명의 회사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와요. 전 저희 이노디자인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죠.
실제로 저희가 디자인한 모 브랜드의 핸드폰 중에는 한 모델로 1조원 이상 팔린 것이 있습니다. 10억 달러를 달성한 거죠. 가치혁신의 해결사 역할을 저희가 해낸 셈이죠.
- 가치 혁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디자인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고객사의 모 회장이 직접 한 말이 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미국의 제일 큰 컨설팅 회사가 방문한다고 했나봅니다. 그랬더니 대뜸 "내가 한 시간 동안 그쪽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돼? 맨날 들어봤자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냐! 지금 계속 문제만 지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난 구체적인 솔루션이 필요해. 여기서 김영세 사장이나 좀 더 볼게!"라고요...
디자인은 솔루션이거든요. 해결책이죠. 디자인이라는 것이 이젠 21세기형 경영마인드가 됐다는 겁니다. 그건 말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실적이 나와야 하는 거죠.
- 삶의 목표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글쎄요. 'DESIGN BY INNO'가 지구촌 곳곳에서 최고의 브랜드가 되는 것 정도라고 해두죠. 'DESIGN BY OO'가 'MADE IN OO'보다 우선시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또, 이노디자인 때문에 제품을 사는 것이 당연시 되는 시대가 오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만큼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이들이 느꼈으면 좋겠고, 저희가 그런 시대를 여는 데 일조했으면 합니다.
김영세 사장
1950년 서울 출생 / 74년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 78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학사·석사 / 80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 / 86년 미국 실리콘밸리 이노디자인 설립 / 97년 서울 이노디자인 설립 / 현재 이노디자인 대표이사
■ He is... - 예술가 기질의 창조적 CEO
김영세 사장은 사업가보다는 예술가 분위기를 더 많이 풍긴다. 복장이나 헤어스타일 등 외모부터 말하는 것까지 그 나이 그 또래, 그 정도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면 으레 따를 법한 것들을 거의 모두 깬다.
계획하기보다는 즉흥적인 상황을 즐기며, 불쑥불쑥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멋지게 정리되는 과정을 즐긴다. 회사에서는 회의 시간을 따로 두지 않으며, 아무 때고 즉석 미팅을 한다. 김 사장의 책상은 언제나 지저분하고 엉망인데, 반듯하고 정리된 것을 싫어하는 오래된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카오스에서 순간순간 아름다운 패턴이 나왔다 사라지듯, 정리되지 않은 책상에서 아이디어가 생기면 냅킨같은 주변의 물건을 이용해 무작정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그린 것이 수십억짜리 제품이 되고, 대박 상품으로 탄생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의 예술가적 성향은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교내 그룹사운드 '다이아몬드 포'를 조직해 음악에 빠졌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 쓰고 미대에 입학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시절엔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와 함께 도깨비 두 마리라는 의미의 '도비두'를 결성해 공연을 하고 다녔다. 관습적인 규칙에 따르기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체질적으로 즐기는 타입인 셈이다.
김 사장의 이런 성향은 아들에게 이어져 아들 윤민 군은 현재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최근 김 사장의 저서 《이노베이터》 출판 기념에서 윤민 군이 노래를 불렀는데, 김 사장은 아들을 '차세대 밥 딜런' 이라고 소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 사장은 디자인을 '인술(人術)' 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것을 아들에게 배웠노라고 고백한다. 어린 아들이 어머니날(Mother's Day)에 선물한 재치 있는 쿠폰 북 디자인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는 것. 쿠폰 북에는 '엄마 차 세차하기' , '설거지 하기' 등 기특한 서비스와 유효기간이 적혀 있어 그 기간 내에 한 번씩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엔 'Love!!' 라고 적고, 유효기간을 'Forever(영원히)'라고 했다.
그는 아들의 작은 쿠폰 북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출발은 소비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그것은 소비자 만족을 넘어 소비자 감동으로 이어지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디자인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수단인 것이다.
- Economic Review (272호) / 대담 : 김경한 편집국장, 정리 : 박일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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